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었던 '페르시아 공주' 사건
본문 바로가기

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었던 '페르시아 공주' 사건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주에서 발견된 미라로 알려져 세간의 이목을 끌은 미라인 줄 알았으나, 위작으로 판정되었던 사건. 참고로 위작으로 판정된 그 이면에 끔찍한 사실까지 존재하고 있었던 사건이다.

2000년 10월 19일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주 정부는 알리 아크바(Ali Aqbar)라는 남자에 관한 정보와 비디오 테이프를 입수했다. 그 비디오 테이프에는 한 미라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문제의 페르시아 공주였던 것. 또한 이 알리 아크바라는 남성은 이 미라를 예술품 암시장에다 6억 파키스탄 루피에 이 미라를 출품했고, 결국 발루치스탄 주 정부는 파키스탄 문화재 보호법으로 그 남자를 고발했고, 그 미라를 찾아오게 된다.

한편 그 미라는 그 근처 부족의 족장이었던 모하메드 리키라는 남성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 모하메드 리키는 훗날 이 미라를 샤리후 샤 바키라는 이란인에게 받았고, 그 바키라는 이란인이 퀘타(발루치스탄의 주도) 부근에서 난 지진으로 인해 입수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직후 미라는 감정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감정 결과 놀랍게도 이 미라는 기원전 600년경의 것으로, 아케메네스 왕조의 초대 국왕인 키루스 2세의 왕녀의 미라로 추측된다는 감정 결과가 나왔다. 이 미라는 고대 이집트 양식으로 싸여 목관에 담겨진 채, 설형 문자가 새겨진 사르코파구스(미라를 보존하는 석관) 안에 보관되어 있었고, 가슴 위의 금으로 된 플레이트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의 딸, 로두구네"라고 씌여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미라는 페르시아에서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던 형태라 자연히 고고학자들의 이목은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여담으로 전술했다시피 이 문화재의 복잡한 내력 덕분에 이란과 파키스탄 정부 사이에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란 정부에서는 "페르시아 왕실의 미라이니 당연히 이란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파키스탄은 파키스탄대로 "우리나라 내에서 발견된 것이니 우리 문화재"라고 맞섰다. 그리고 엉뚱하게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마저 이 미라가 자국의 문화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뒤 이 미라가 뉴스를 타고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자연히 의혹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후 미심쩍다는 사실을 깨달은 파키스탄에서 정밀조사를 시작했는데... 미라는 미라가 발견되기 5년 전인 1995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21~25세 가량의 여성의 시신으로, 역시나 가짜였다. 또한 미라화된 여성의 시체 목 부위에서 둔기로 인한 골절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살해당한 여성의 시체였다.

또한 이 여성은 사후에 치아가 모두 제거되었고, 골반뼈가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또한 미라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는지 화학 분석 결과 그녀의 몸과 머리카락은 표백을 한 상태였고, 복부에는 중탄산염 소다와 염화나트륨 같은 현대적인 건조제가 채워져 있었다. 이는 미라를 만드는 데 수개월 이상의 상당한 시간이 걸렸음과 해부학 쪽의 전문가가 이 일에 참여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당연히 파키스탄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고, 용의자를 심문해봤지만 끝내 범인은 잡지 못했다.

그 후 여성의 시신은 2005년 파키스탄의 최대 자선단체인 에드히 재단에서 인수하여 조촐한 장례식을 치렀으며, 이후, 2008년 매장 허가가 나와서 정식으로 묘지에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