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어릴 적 이름은 박정렬이다. 그는 전남 영광군 출생이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편부모 가정이라지만, 실제로는 그의 부모는 가난했고 도로변의 허름한 점포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고 형도 세상을 떠난 뒤부터 본래 가난했던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고 한다. 그는 홀어머니와 남은 동생들을 잘 돌보는 효자였다고 그를 알던 주위 사람들은 그를 기억한다. 박흥숙의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그가 보였던 비상한 똑똑함과 또한 그가 겪었던 지독한 가난함이 기록되어 있었다. 가난으로 인해 가족이 흩어지면서 어머니와 막내동생은 절로 가서 수발을 들며 허드렛일을 하며 연명했고, 그의 여동생은 남의 집의 식모로 일을 하며 살게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박흥숙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그의 최종 학력은 국민학교였다.. 그가 남긴 일기에 의하면 "바라던 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우리집은 가난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 며 당시 그와 그의 가족들이 겪고 있던 사정을 우리에게 전한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해야 할 나이에 광주시내에서 열쇠수리공으로 일을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것인지, 주경야독을 하여 다섯달 후 검정고시에 합격했다고 그의 여동생과 그의 일기는 증언한다. 검정고시로써 고등학교 과정을 통과한 그는 곧바로 사법고시를 준비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계획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법관이 되면 가난을 벗어나 흩어진 가족들을 모아서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이때 그가 자신의 거처로 삼은 것이 무등산이다. 그는 무등산 산자락으로 들어가서 움막집을 세우고 흩어졌던 가족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았다. 당시 무등산 자락 주변에는 스무여 가구가 빈민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주민들이 박흥숙과 그의 가족이 굶주림에 허덕이면 자신들의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훗날 사건 이후 형성된 박흥숙을 동정하는 여론은 주로 이 주민들의 증언에서 기인했다.
박흥숙의 어머니는 산중턱에 있는 무당의 집에서 무당의 수발을 들고 허드렛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박흥숙과 그의 가족사를 서술하는 이유는 훗날 발생할 사건에 대한 왜곡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체격이 작고 허약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여 구한말 동학군 사이에서 읽히던 정도술이라는 무술책이 집안에서 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는 그것을 수련했다고 한다.
1977년 4월 20일 운명의 그날. 이 날 광주시 동구청 소속의 건설반장인 오종환 반장과 철거반원 일곱 명이 무등산을 올랐다. 그들의 목적은 등산이 아닌 바로 이 일대의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기 위한 산행이었는데, 마침 그즈음에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청에서 판자촌 주민들에게 앞서 알려 나머지 집들을 철거된 상태였지만, 갈 곳 없는 여덟 가구의 집들만 남은 상황이었다. 이렇게 남은 사람들은 운명의 그날까지 차일피일 철거를 미루며 버티었던 것이다.
절박한 박흥숙과 또한 다른 의미에서 절박한 철거반원 사이에 시비가 붙었는데, 철거반원 중 일부가 어머니를 밀치며 욕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사 결과와 증언에 의하면, 이때까지 박흥숙은 어머니를 말리면서 "저 사람들도 위에서 시켜서 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라며 그들을 동정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철거반이 가재도구를 모두 움막집 바깥으로 옮길 때 박흥숙도 그들과 함께 가재도구를 옮기면서 철거를 협조했다.
그런데 살인사건의 시작은 철거 반원들이 집에 불을 지르면서 시작되었다. 추측건대 단순 철거만 했다간 다시 지어 살 우려가 있으므로 상부에서 완전 전소를 명령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집 지붕에는 박흥숙의 어머니가 무당의 집에서 일을 하며 모은 돈 30만 원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강력하게 항의했다.
여기까지는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은 그가 네 명의 철거반원들을 살해한(한 명은 중상을 입고 생존한 김영철) 결정적 계기는 다음과 같다. 그의 움막집으로부터 삼백 미터 정도 떨어진 집에는 김복천과 그의 처가 살고 있었는데, 당시 박흥숙은 "저 집에는 병에 걸린 노부부가 살고 있으니 선처해달라."라는 요청을 했고 철거반원은 이를 수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결국 그 집이 불타는 모습을 본 박흥숙은 엄청난 적개심과 분노에 사로잡혔고, 결국 넘어선 안될 강을 건너고 만다.
이에 대하여 박흥숙은 따져 물었는데, 철거반장 오종환은 "어린놈이 지랄한다."라며 박흥숙을 깔보았고, 더욱 분기가 탱천한 박흥숙은 철거반장 오종환을 향하여 자신이 만든 사제 공기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했다. 그가 사제 총을 만들 수 있던 연유는 바로 그가 열쇠공을 시작으로 금속을 다루는 일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총을 든 그는 철거반장에게 부하 반원들을 모두 모으라고 위협을 가하여 철거반원 7명 중 5명이 불려왔고, 박흥숙은 여동생에게 지시하여 철거반원들을 묶게 하였다. 당시 그가 이들을 결박한 이유는 이 사람들을 결박하여 도망가지 않게 한 뒤 그는 스스로 시내로 가서 당시의 광주시장에게 따지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박흥숙은 포박한 철거반원들을 자신의 공부방으로 파 놓았던 구덩이에 넣은 다음, "불태운 우리 집에 사과해라"라고 호통을 쳤는데, 이 와중에 철거반원들은 마침 헐겁게 묶여 있던 포박을 풀고 반항하였고, 박흥숙은 망치로 그들을 공격해서 5명 중 4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것이 박흥숙 살인사건이다.
살인을 저지른 박흥숙은 놀라서 도주하였고, 박흥숙의 여동생은 시내로 내려가서 광주 시청으로 가서 시장을 만나려 했으나 시장은 만나 주지 않았다. 그녀는 시청 직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전한 뒤 없어진 집터로 갔다. 이로 인해 어머니는 공무집행방해죄, 여동생은 살인방조 혐의로 체포되어 무등산에서 하산했다.
한편 박흥숙은 광주 시내로 내려와 예금해 두었던 돈을 찾고 머리를 깎고 양동시장에서 하늘색 재킷을 산 뒤 시외버스를 타고 여수로 향했다. 그는 여수에서 1박을 한 다음 여수역에서 서울로 향했으며 서울역 앞의 여인숙에서 다시 1박 후 상계동의 이모 집에서 숨어있다가 시민의 제보로 붙잡혔다.
여기까지는 경찰의 거짓 조작 발표이며 박흥숙이 자수 후 진술한 그의 도주 행각은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흥숙이 진술한 바로는 광주에서 여수로 기차를 이용하여 이동했다. 그는 이 기차 안에서 해외로 나가는 배를 타는 정 모 씨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에 의하면 정 모 씨는 북한의 간첩으로 의심되는 말을 썼다고 한다. 그가 간첩임을 확신한 박흥숙은 날이 늦었으므로 우선 여인숙에서 1박을 한 다음 서울로 향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간첩신고를 하러 중앙정보부를 찾았고, 더불어 자신이 광주 무등산에서 살인을 저지른 박흥숙이라고 자신의 신명을 밝히며 자수도 했다고 한다. 이후 중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받고 검거, 즉 자수를 하여 연행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는 박흥숙의 진술에 의한 것이니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지만 최소한 제보로 붙잡힌 것이 아닌 스스로 자수한 것은 재판부에서도 인정한 사실이다.
자수를 하여 검거된 박흥숙은 자신의 살인죄를 인정하고 반성한다고 밝혔다. 그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죄를 뉘우치고 어떤 극형이든 받겠다고 언급했다. 자수를 했다는 주장이 항소이유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나아가 가장 중요한 점은 재판부가 기록 검토를 통해 피고 박흥숙은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수를 한 것이 맞다고 인정을 했으니 최소한 박흥숙이 자수를 했다는 주장은 사실로 인정되었다.
이후에 빈민촌 철거 과정에서 발생한 철거반원들의 폭력이 사건의 배경이라는 점과 박흥숙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하여 박흥숙에 대한 구명운동이 있긴 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사형집행을 하지 않은 채 범법인이 3년 동안 징역을 살고 나면 무기징역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박흥숙은 결국 사형 선고 후 딱 3년이 돼 가던 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당시 박흥숙 사건에 대하는 경찰과 언론의 행태는 중립적인 사실 보도보단 남은 판자촌 사람들의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프레임에 맞춘 경향이 강하다.
박흥숙에 대해 사실관계를 틀어서 나쁜 점을 부각한 문제라면, 박흥숙의 어머니인 심금순씨가 무등산에서 거대한 굿판을 벌려 광주시내의 돈을 긁어가는 무당이다 라는 보도가 마구 쏟아졌는데 현실의 그녀는 무당의 잡일을 돕는 댓가로 생계를 꾸리던 가난한 사람이였다. 나아가 이것도 모자라서 당시 판자촌과 무등산 일대를 사이비 종교가 판치는 곳이라고 왜곡하기까지 했다.
박흥숙이 무예를 연마해서 맨손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력과 완력을 지닌 사람처럼 당시 보도됐지만, 박흥숙이 배웠다는 무술은 조선시대의 무예였던 정도술이 고작이였다. 박흥숙의 살인에서 등장한 사제 총기에 관해서 당시 언론은 사회에 불만을 품은 박흥숙이 이전에 만든 총이라고 보도했는데, 실제로 그 총은 쇠파이프로 만든 실탄발사가 가능한 사제총이었다. 그리고 살해현장인 그의 공부방 즉 구덩이에 관해서 경찰과 언론은 그가 사람이 오면 죽이기 위해 이전부터 파놓은 것이라고 했지만, 증언에 의한 실상은 집이 철거될 것을 예상한 그가 집이 철거된 이후에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비상용으로 파놓은 구덩이였다.
박흥숙의 체포에 관한 내용 보도에서 가장 큰 문제가 존재했다. 당시 경찰의 보도내용과 달리 박흥숙은 자수를 했고, 상계동의 이모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광주지방경찰청창이 받은 보고에는 그가 서울방향으로 도주한 후에 믿기지 않지만 중앙정보부에 자수해서 검거됐다고 되어있다. 즉, 경찰 내부의 보고체계와 발표내용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다. 앞서 서술한대로 박흥숙이 간첩신고를 하면서 이를 신고한 자신이 살인범 박흥숙이라고 같이 밝혔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가 자수를 했다는 주장이 항소이유서에도 언급되었고, 가장 중요한 점은 재판부가 기록 검토를 통해 피고 박흥숙은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수를 한 것이 맞다고 판결문에도 인정이 됐으니 최소한 박흥숙이 여수행 기차를 탔고 서울에 와서 자수를 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사실로 인정되었고 체포되었다던 당시 보도내용이 거짓말인 것이다.
당시 보도에서 이 살인사건의 발단인 무허가 판자건물을 철거하면서 불을 질렀던 사실을 보도하지 않으며 숨기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이전부터 있던 도시빈민 철거에서 벌어진 여러 사례로 인하여 민심을 악화시킬 수 있단 것이였던 듯하다. 다만 신인 르포작가 김현장은 월간 <대화> 지 1977년 8월호에 '무등산 타잔과 인간 박흥숙'이란 기고문을 내면서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해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