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요리가 취미 내지 가사 목적이 아니라 직업이 되는 순간 내가 아니라 손님이 원할 때 요리를 해야 한다는 말이 되므로 여기에서 이미 스트레스가 쌓이게 된다. 즉 정해진 시간만큼 일하면 되므로 노동이 규칙적인 다른 직종들과는 달리 노동이 매우 불규칙해진다. 물론 손님이 적게 온다면 스트레스가 덜하게 되겠지만, 그러면 매출이 오르지 않는다. 따라서 다수의 손님들을 불특정한 시간에 받아야 하므로 여기에서 매우 고되게 된다. 더 문제인건 한 가지 요리만 파는 식당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보다 많은 손님들을 잡으려면 다양한 메뉴 취급이 필수이므로 한가지만 줄창 하는게 아니라 여러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하며, 같은 요리라도 손님이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도 있다. 즉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5분 대기조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루 평균 12시간씩 서서 일한다는건 보통일이 아니다.
또 사람의 건강과 직결될 수 있는 음식을 취급하는 만큼 위생 문제를 크게 신경써야만 한다. 만약 소홀히 했다가 먹는 사람이 식중독이라도 걸리면 경력에 큰 타격이 날아온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주방 위생 문제가 몇번 제기된 이후로 바깥에서도 볼 수 있도록 개방된 주방들이 늘어나면서 특별히 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미처 판매하지 못하고 남은 식재료의 날짜를 꼼꼼히 구분하여 유통기한이 지나는 식재료를 쓰는 일이 없도록 신경써야 하고, 서로 다른 식재료를 같이 보관해서 교차오염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보관 공간 확보도 신경써야 한다.
재료를 대량으로 구매해둬야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게 되므로 엄청난 양과 무게의 재료들과도 씨름해야 한다. 매일매일 수십, 수백명 분의 식자재가 식당에 납품되므로 이것을 전부 제자리로 옮기는 것도 요리사의 할 일이다.
요리하는 내내 뜨거운 불과 씨름해야 하고, 무거운 조리도구들을 마구 휘둘러야 하기 때문에 고생은 더욱 늘어난다. 특히 크고 아름다운 조리기구가 많은 중식당이 이 분야에서 막장의 끝을 달리는데 가정용 가스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업소용 화력의 불꽃이 난무하기 때문에 땀이 뻘뻘 흐르고, 크고 아름다운 웍을 오직 한손만으로 들은 채 그 안에 담긴 식자재들과 함께 흔들고 볶아야 하므로 팔에 가해지는 힘이 어마무시하다.
이 모든 문제점은, 단체 급식 같이 한정된 메뉴 몇 개만 잔뜩 만들어두면 끝나는 방식의 조리를 하게 되면 그나마 사정이 나아진다. 그냥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메뉴만 조리해놓으면 끝이기 때문. 하지만 이 경우 한번에 엄청나게 많이 조리해야 하기 때문에 재료 손질 및 도구 정비에 엄청난 시간이 들어가므로 다른 방향으로 괴로워진다. 단적으로 밥을 하기 위해 쌀을 산처럼 쌓아두고 씻어야 하고, 양파 준비는 눈물 콧물 나올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때문에 가정에서는 주로 여성이 요리를 전담하는 탓에 요리는 여성의 일이라는 편견이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직업'으로서의 요리사는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물론 여성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유명한 셰프들을 국적을 막론하고 떠올려보면 절대다수가 남성이다. 여성의 근력으로는 요리를 '직업'으로 삼는게 어렵기 때문이다. 즉 세세한건 다르지만 택배 상하차 알바나 막노동 같은 중노동에 속한다.
이와 관련해서 한국 요식업, 사학계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대장금이 히트를 치던 시절에 해외 역사학자들이 상당한 흥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역사 속 대부분 나라의 왕실에서는 왕의 식사를 만드는 과정을 상기한 이유 탓에 남자 신하들이 주도했는데, 작중 조선 왕실에서는 궁녀들이 식사를 만들어 바치는 것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조선 왕실에서도 당연히 남성들이 수라상을 만들었다. 수라간에서 일한 남성들이 바로 앞에서 소개했던 숙수(熟手)이다. 즉, 드라마에서 여성들이 수라상을 준비하는건 현대인의 취향에 맞춰 수정을 가한 것에 불과한 것. 이것 때문에 당시 사학 전공 석박사들이나 학부생들은, 같은 사학을 공부하는 외국인 동료와 메일이나 펜팔을 주고받았을 경우, 하루가 멀다 하고 "너희 나라는 신기하구나. 여성들이 왕의 식사를 만들다니."라는 연락을 받는 게 일이었다. 특히 동아시아권에 대장금이 워낙에 빅히트를 친지라, 오늘은 중국에서 대학교 교수인 중국인이, 내일은 일본에서 공부하던 일본인이, 모래는 태국에서 박물관 소장인 태국인이 물어보는 식으로 아주 골머리를 앓았을 정도.
그런데 사실 아주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왕손들이 다수의 남자 하인들을 거느리기 힘들어지자 수발을 들던 몇몇 궁녀들이 대신 수라상을 만들었고, 훗날 조선왕실의 궁중음식을 배우려던 인물들이 그 살아남은 궁녀들로부터 음식을 배우면서, 궁중음식은 궁녀가 만들었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제기하는 이도 있다. 구한말부터 궁중에 도입된 서양 요리는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남자 요리사들과 웨이터들이 남아 있었다.
직급에 따라 비율이 다르지만 요리사는 요리만 하는 것이 아니다. 현장에 따라 다르지만 처음 취직했을 때는 재료 준비, 청소가 대부분이다. 설거지나 기물 정리를 하면서 점점 동선과 위치를 파악하고 눈치껏 조리 스킬을 익히면, 그때부터 진짜 조리라는 것을 조금 시켜준다. 이 과정은 통과의례로, 이때 못 버티고 나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호텔의 경우 현재 15년간 서울 르네상스 호텔에서 근무하다 지금은 모 학교에서 일본 요리를 가르치는 한 교수는 호텔에 처음 들어간 지 3년이 지나서야 부엌칼을 잡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한편 홍콩의 유명한 볶음국수집에서는 들어오는 즉시 처음부터 요리를 가르치는데, 국수를 제대로 볶는 불 조절 배우는 것만 2년을 시킨다고 한다. 이 집은 조리실이 정말 단조롭고 동선이 거의 없는 편이라서 어디까지나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요리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양식의 가장 기본적인 통과의례가 바로 오믈렛인데, 모양을 제대로 내기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이것만 3년 하다가 결국 때려치우는 사람도 있을 정도.
사실 신참에게 주방 잡무를 시키는 이유는, 메인 셰프의 체력을 조금이라도 본요리에 집중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부엌 기초부터 파악하라는 이유가 크다. 애초에 큰 식당의 부엌은 정말 혼란스럽다. 10년 넘게 일한 사람들도 실수하면 바로 동선이 꼬이면서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조리실에 헬게이트가 열린다. 당장 굴러다니는 물건만 해도 불에 잔뜩 달궈진 조리기구, 유리, 날붙이 등 위험한 것들 투성이다. 거기다 습기까지 머금은 바닥은 사람들이 넘어지게 만드는 주범이다. 더러는 식용유가 떨어져 있는 경우가 있다.
짬이 많은 요리사는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시그니처 디시'가 존재한다. 최현석 셰프의 냉파스타, 이연복 셰프의 동파육이 그 중 대표적인 예. 고든 램지는 비프 웰링턴을 시그니처 디시로 삼고 있다.
위에 경우는 어디까지나 고급, 그러니까 사람들의 요리사라는 직업에 대한 판타지를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줄 수 있는 현장을 말한다. 동네에 흔한 웨딩홀이나 뷔페는 그런 거 없다. 심지어 지식과 경험이 거의 없는 알바가 요리하기도 한다. 특히 애슐리와 같이 쉽게 말해서 완제품 음식을 만드는 공장인 센트럴 키친이 잘 갖춰진 프랜차이즈에서는 이미 냉장/냉동 상태로 온 음식을 비교적 간단한 가열만 하면 바로 서빙이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비싼 몸값을 줘야 하는 조리사 자격증 취득자를 쓸 이유가 없다. 다만 이런 뷔페도 식당인 것은 맞기에, 알바 보조를 몇 명 쓰든 자격을 가진 조리사가 한 명 이상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다만 상기한 가정에서의 편견을 반영해서인지 1980년대 이전에는 방송의 조리 프로그램은 거의 전부 여성 요리사들이 진행하고 있었고, 프로그램 진행자(아나운서, MC)도 여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고든 램지, 이원복, 백종원 등의 남성 셰프들이 유명해지면서 이제는 남성 요리사들이 방송계 대세를 꿰차고 있다. 여성의 경우에는 상기한 '요리사'보다는 '요리연구가'로 주로 많이 활동하는데 이는 상기한대로 '요리사'는 노동 강도가 험악해서 여성이 하기 힘들기 때문. 실제로 당시 요리책을 내놓고 요리 학원을 운영하며 방송에도 나오며 다방면으로 활동하던 인간문화재 황혜성 교수, 한복선 씨, 한정혜 씨, 심영순 씨 등등 유명 요리연구가들은 거의 다 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