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이 최영이 한 말로 아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사실 이것은 최영의 부친이 사망하면서 최영에게 남긴 말이다. 최영은 이 말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살았고, 이를 통해 저 말은 유명해졌다. 고려사에서도 최영을 청렴강직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현창은 박한 편이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불학무술(不學無術)"이라는 악평도 남기고 있다. 우직한 반면 학술이 없고 편협했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사는 조선시대의 서술이다보니 최영의 전장에서의 활약을 서술함에 있어서도 다소 깎아내리는 면이 있고, 단순무식한 무장으로 몰아가는 면이 있다.
하지만 최영은 그렇게까지 낮은 평가를 받기에는 부적절한 엄연한 명장이다. 전투에 임할시에 작전 수립이나 정보 수집을 치밀하게 하고 복병이나 기습책도 자유롭게 구사했다. 대표적 전투인 홍산 대첩 때의 과감한 돌격은 왜구의 수가 많지 않았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감행한 것이었다. 단순무식한 맹장이 아니라 전술적 사고를 겸비한 명장이었다는 소리. 멍청한데 만용만 있었다면 금방 죽어버리기 십상인데 최영은 수십년을 전장에서 살아남으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저런 폄하는 왕조 개창 이후 전 왕조의 버팀목이었던 최영을 깎아내리기 위한 서술일 가능성이 있다. 최영은 위화도 회군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로, 조선 개국의 직접적 단초가 되었던 최영을 너무 높이 평가할 경우 조선 개국의 명분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다만 당대 최고 수준의 전술적 능력과는 달리 대전략적으로는 그리 현명하지 못했다. 명나라를 향해 전면적인 전쟁을 벌인다는 최영의 선택은 일이 잘못되면 명나라 수십만 대군의 침공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야기시킬 수 있는, 국가적으로 너무나도 위험한 판단이었기에 식견이 모자라다는 악평은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게다가 재상의 자리에 올라 군인이 아닌 정치가가 되었음에도 융통성 없이 엄격하게 처리하는 것만을 선호했는데 이 또한 정치인으로써는 현명하다고 말하기 힘든 부분이다. 고려 말에 국가가 부패하고 기강이 해이해져서 정치에도 다소의 엄격함이 필요할 수는 있지만, 그가 재상으로써 임한 부분들을 보면 명백하게 과한 조치가 많다. 그가 장수로써 세운 많은 군공이 기록 삭제를 당한 것도 아니고 남아있음에도 불학무술이라는 악평을 들을만한 부분이 그에게는 분명히 존재한다.
전술했듯이 최영은 정치 군인이었던 이성계와 달리 순수한 군인에 가까운 인물이라 정치를 함에 있어선 거침이 없고 철저한 상명하복으로 움직이는 군대의 속성을 그대로 적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일단 일을 시작하면 주변 사람이 아무리 말려도 시행하여 소용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지윤 제거 때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한번 작정하면 이인임도 못 말렸다. 요동 정벌을 추진함에 있어 많은 반대를 모두 무시한 채 군사를 일으키고, 정벌에 반대하던 이성계를 기어이 혼자 보내고 퇴각 불가 방침을 내렸다.
당연히 부하와 백성들에게도 엄격했다. 웬만한 장수들은 군령을 어기면 목이 달아났고, 공민왕 때 6도의 군사를 다스리며 대대적으로 배를 만들고 고려 최초의 대량 수군을 양성하는 만드는 과정에서 70세 이상 된 자에게도 등급에 따라 곡식을 징발하는 바람에 집을 부수고 도망가는 백성이 50% ~ 60%에 이르렀으며 원성이 많았던 일도 있었다. 다만 최영은 이 수군을 만들어 왜구를 방어하고 나서야 백성들이 도륙당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며 물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이런 엄격함은 그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고 사욕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론 국가의 수호신으로 존경해 마지않았다. 실제로 최영은 휘하의 군인이 죄를 지으면 군법을 엄격하게 지켜 참수한 다음 효수하거나 팔을 잘라 조리돌림하기도 했으며, 최영의 조카 사위가 살인죄를 지었을 때 그의 인척임을 감안해 죄를 경감해 주려고 하자 법대로 하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이성계와 대립하였고 조선에서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신돈의 혈육으로 주장하면서 반역열전에 기술하는 등 철저히 폄하된 우왕의 충신이기도 했기에 조선왕조 때 평가절하를 당할 법도 한데 후대까지 고려하면 의외로 크게 폄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세종실록에 보면 최영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는 신하에 대해서 세종대왕이 옹호한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 11월 23일 경신 1번째기사) 왕씨가 아닌 우왕을 세워서 섬겼다면서 비판하는 신하에 대해서 세종대왕은 후에 태조가 왕이 될 수 있도록 미리 떡밥 깔아준 게 아닐까 하는 어조의 반론을 한다. 물론 신하들은 "그땐 태조께서 왕위에 오르실 낌새도 없었는데요."라고 단칼에 잘라버리지만. 정몽주가 조선 왕조의 창립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절은 조선왕조에서 높이 숭상되었던 것과 비슷한 사례. 조선 초기에는 최영의 언급 자체도 상당히 경계했지만 후대 왕들은 최영, 정몽주를 통해 고려 말의 부패와 망국의 상황을 더욱 극화하여 역으로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한편, 신하들이 최영과 정몽주가 고려에 충성했듯이 조선에 충성하길 바랐다.
덧붙여 말로만 지휘하는게 아니라 직접 최전선에 뛰어드는지라 최영은 상처도 많이 입었다. 그런 상처를 입으면서도 분투해서 승리를 거두었고 말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강직하고 두려움 없는 무장이었다. 홍산 대첩 때도 그렇고 그 전에 홍건적과 싸울 때도 직접 최전선에 뛰어들어 싸우다 창으로 찔리거나 베여서 여러 번 상처를 입었는데도 싸워 그 전투를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최영의 명성과 높은 평가는 자국에 한정된 게 아니라 타국에도 적용되어 최영이 죽으면 무장 하나 죽는게 아니라 고려 전체에 직결된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최영 열전에서 최영의 명성과 용맹이 근방에도 알려져서 최영이 지금 죽으면 개인이 죽는 정도가 아니라 국가의 위신이 위태로워진다고 언급했다. 즉, 살아있는 것만으로 외적의 침략 억제력 역할도 하고 있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