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羅蕙錫, 1896년 4월 28일 ~ 1948년 12월 10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차미리사와 같은 여성지식인로 평가받았다.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정월(晶月)이다.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출생으로 수원 삼일소학당과 서울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했다. 귀국 후에는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지내기도 했고, 김일엽과 함께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 발행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나 참판댁 또는 나 부잣집이라고 불리는 경기도 수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나기정(羅基貞)과 어머니 최시의(崔是議) 사이의 2남 3녀 중 넷째(차녀)였다. 동복 형제들 외에 나계석이라는 이복언니도 있었는데, 나기정이 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서녀였다. 나계석은 나혜석이 태어날 무렵, 13살의 어린 나이에 조혼을 했다.
나혜석은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는 등 부족함 없는 삶을 보낸 것으로 보이지만, 개인적으로 그리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고위 관료였던 아버지 나기정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자녀들에게 신교육을 받게 해주는 등 상당히 진보적인 엘리트처럼 보였지만, 시대적인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딸들에게는 정식 이름이 아닌 아명을 불렀고, 나혜석 또한 진명여학교 입학 전까지는 정식 이름 대신에 '나아기(=나 참판댁 아기씨)' 로 부르다가, 학교 입학 후에야 정식으로 ‘나명순'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과 개인사 때문인지 나혜석은 이름에 대해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
또한 나기정은 본처 최시의 외에도 여러 여자들을 첩으로 두었다. 심지어 나혜석이 10대일 때, 나혜석보다 불과 1살 연상인 어린 첩을 두기도 했다. 그 어린 첩은 기생 출신이었는데, 가장인 나기정으로부터 총애를 받는다는 자신의 이점을 이용하여 최시의에게 온갖 갑질을 했다. 본처의 입장에서 첩에게 무시를 받는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결국 최시의는 남편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많은 고생을 했다.
이런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며 자랐던 나혜석은 당시의 남성중심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반감을 가졌다. 나혜석은 고통받는 어머니의 삶과 (아마도 1910년대에) 주변의 또래 친구들이 어린 나이에 강제적으로 시집보내져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절대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고도 한다.
1926년 김우영과 결혼했다. 김우영은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하다가 일본 외무성 관료가 된 인물로, 나혜석의 세계일주도 사실 남편이 일본 외무성에서 포상휴가로 받은 것을 부부동반으로 따라가게 된 것이었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시, 소설, 칼럼, 강연 등을 통해 '여자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하였다. 1927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의 어느 날 그는 프랑스의 한 여권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파리에 체류할 무렵, '남녀관계,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혼자 계속 파리에 남기로 결심했다.'라고 했다. 또한 귀국 후 그는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렸다. 인간평등에 기초한 참정권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결혼 등 여성문제를 소개하였다.
그녀는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조선 신여성의 표본이 되었다. 그는 억압된 조선 여성들을 대변하고,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고자 했다.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라는 주장을 글로만 쓴 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한 것이다.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질타했던, 글과 그림으로 ‘여자도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그는 여자, 남자 이전에 사람이라며 여자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라며,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해줄 것을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일제, 보수적인 지식인과 노인, 유학자 등은 모두 그의 견해를 외면했다.
<섣달대목, 초하룻날>이란 제목의 연작은 여성들의 일상과 가사노동을 중심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섣달의 풍경을 담고 있으며, 계속해서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는 만평형식의 목판화에도 신여성·구여성의 고달픈 일상에 대한 연민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명절이 여자들에게만 일을 시키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했다. 나혜석이 1930년대 신문삽화 <섣달대목>으로 일찌감치 명절이 여성들에게 고단한 날임을 고발하였다. 그가 명절의 고단함을 지적한 것은 후일 명절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화두가 되기도 했다.
결혼을 여성을 억압하고 옥죄는 족쇄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이혼의 비극은 여성해방으로 예방해야 하고 시험결혼이 필요하다.'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칼럼을 <삼천리> 잡지에 기고하여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나혜석은 잘못된 결혼으로 불행을 야기하는 것보다는 시험 결혼이나 동거혼 비슷한 결혼을 통해 비극을 예방해야 된다고 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 서로 맞지 않는 결혼 생활을 억지로 유지하면서 불행을 억지로 참고 살아야 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가정폭력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 여성 지인들에게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 알콜중독 남편 등의 가정폭력이나 구타를 억지로 참지 말고 이혼하라고 하였다.
몇 편의 시와 《규원》(1921년), 《현숙》(1936년) 등의 단편소설, 그리고 여러 편의 수필을 발표했는데 수필과 작품에서는 주로 인습의 굴레에서 고통받는 여인들의 삶을 그렸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을 썼으며, 여성이 각성하고 사람답게 사는 길로는 교육과 계몽, 사회참여, 남자들로부터의 경제적 자립 등을 들었다. 그의 작품 중 《경희》는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기도 했다.
그녀는 인형보다는 인간이기를 원했던 여성이었다. 19세에 <이상적 부인>이란 글에서 현모양처론이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는 주의라고 주장한 바 있는 나혜석은, 40세에 쓴 글 <신생활에 들면서>에서도 여성의 정조는 취미일 뿐이지 도덕이나 법률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근대 사회로의 전환기, 개성의 확립이 문화계의 화두였던 시절 나혜석은 여성화가와 여성해방론자로, 그리고 여성작가로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마다가 조선 여성의 진일보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아이는 에미의 살점을 떼어먹는 악마' 라고 분노하던 그는, 모성애를 "사회가 여성에게 인위적으로 강요한 역할"이라고 주장하였다. 모성이라는 이름 아래 어머니는 수많은 희생을 감내한다. 그리고 이는 본능이 아니라 강요라는 것이다. 그는 모성애가 사회에 의해 학습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을 처음 언급하였다. 그는 모성애가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강요되는 강요의 결과물로 파악하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도 비슷한 논지의 내용을 주장한 바 있다.
나혜석은 여성에게 모성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사회가 여성에게 인위적으로 억압, 강요한 역할이라고 규정했다. 여성에게도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의 자유와 성공 등의 욕구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현모양처는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인습이자 굴레라고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라 하였다. 그는 모성은 인간으로서 자식과 관계를 맺으며 쌓아가는 경험적 인간관계라 주장했다.
모든 여성은 모성애를 지니고 태어나는가, 학습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자 그는 모성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물이 자기 새끼를 버리는 것이라거나 새끼를 물어 죽인 수컷과도 관계하는 것을 하나의 예로 들기도 했다.
"잠 없고는 살 수 없다. 이런 것을 탈취해가는 자식이 생겼다 하면 이에 더한 원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 정의한다."
나혜석은 종종 '자식은 악마', 또는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 '자식은 모체를 희생시키는 존재'라고 규정하였는데, 자식을 악마라고 발언한 그의 발언들 역시 화제가 되었다.
그는 "모성애는 의무사항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나혜석은 결혼 1년 만에 첫아이를 낳았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빠른 임신, 고통스러운 출산과 육아의 심경을 '모(母) 된 감상기'로 『동명』지 1923.1.1~21호에 발표한다. 여기에서 나혜석은 모성애가 본능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후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며,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1923년의 <모 된 감상기>에서 그는 자신이 “나열(羅悅)의 어미’는 '어미 될 때'로 '어미가 되기'까지의 있는 듯 없는 듯한 이상한 심리 중에서 '있었던 것을' 찾아 여러 신식 엄마들과 공유하고자 '그렇지 않습디까, 아니 그랬었지요?'라고 묻고 싶다”는 게 이 글의 취지였다. 즉 그는 '엄마'로서 겪는 여러 감정을 다른 엄마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사회가 강요하는 모성애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모 된 감상기>에서 그는 자신의 임신 과정을 고백했다. 그는 입덧을 하면서도 자신이 임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했다. “그런 중에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오싹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가끔은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로 설레고 기쁜 적도 있었지만, 촉망받던 예술가로서의 인생이 갑작스러운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헝클어져 버린 것에 대한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더 컸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여성이라고 해서 임신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모성애가 생기는 것은 아니더라고 말한다. 나혜석은 임신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발표되자 지식인 남성들은 반발했다. '백결생'이라는 필명의 논객은 모성애는 숭고한 것이라며 "원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존귀가 여기 있고 여성이 인류에게 향하여 이행하는 최대 의무의 한 가지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반박했다. 여기에서 그는 나혜석의 임신이나 육아의 의무를 방기하려는 태도라고 규정, 비난했다.
그러자 나혜석은 이에 자신의 감상기가 임신과 출산을 한 여성들의 솔직한 감정이라고 반박한다. 그래서 자신의 글이 분명 일부 여성들에게는 공감을 얻으리라 확신한다고 말한다.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하자, 일부 지식인 남성과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나혜석은 "모든 어머니가 모성애를 가진 것은 아니며, 모든 여성이 모성애를 가진 것은 아니며, 모든 여성이 모성애를 가져야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하였다. 또한 사회가 여성에게 모성애를 강요한다고 반박하였다.
논쟁이 있은 후 훨씬 나중의 일이기는 하지만, 나혜석의 아들은 자신을 이렇게 적대시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으며 원망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모성이 신화라고 주장하면서 정작 그 수단으로 아이를 학대한 부분에 대하여는 생각해 볼 만한 부분.
하지만 나혜석은 이혼 후, 자신의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남편 몰래 아이들을 찾아오곤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임신과 출산 그 자체에만 회의감을 품었을 뿐이지 친자식을 적대시하지는 않았던듯 하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는 아무리 좋게 쳐줘도 우리들을 버리고 우리들을 욕하며 적대하는 매정한 어머니 그 이상도 이하로도 보이지 않았으며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결국 자신의 생모에게 정이 다 떨어진 뒤였고 이로 인해 나혜석은 아이들을 그리워만하다 최후를 맞게 된다.
나혜석은 전통과 근대가 충돌한 혼란스런 식민지의 과도기 상황에서 이상적인 사랑과 결혼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했다. 그는 결혼하는 것만이 올바른 선택은 아니라고 평하였다. 결혼 생활 중에는 이를 조심스럽게 내비쳤지만, 1930년 이혼 이후에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결혼 제도의 대안으로 독신 생활, 남자 매춘부, 시험 결혼, 이성 간 우정과 같은 다양한 대안들을 제시했다. 그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라며 "결코 마음의 구속을 당할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혼에 대한 편견과 색안경에 대해서도, 이혼 역시 하나의 선택에 불과하며 죄악이거나 잘못은 아니라며 반박하였다.
그는 "여자도 인간이다."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반복 되풀이하면서 여자들의 인권, 권리를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일부 글에서 가족애를 다룰 때에는 여성인권에 대한 의견을 모호하게 드러내기도 했는데, 이는 당대 상황에 지혜롭게 맞춘 현실주의적인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당시의 남자들의 가부장성은 무척 뿌리깊었고, 제도 자체는 개혁할 수 있어도 어릴 때부터 뿌리깊게 새겨진 성향은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연령과 관계없이 평등을 추구한다고 해도 중고생이 성인인 나에게 대뜸 반말을 쓰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저 당시는 여성이 독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데다, 남성이 매우 극단적인 가정폭력을 저질러 아내와 자녀가 매우 큰 위험에 처하는 등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세간의 눈에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던 것. 그렇다면 사소한 가정생활에서의 자존심이나 주도권 정도는 조금 접어주고, 대신 남편에게 책임감을 더 부여하여 외도나 일탈을 통제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전략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당시 여성들 중에서 꿋꿋히 주체성을 유지할 여성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신가정이 불화가 컸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즉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해할만한 이야기라는 것.
그녀는 자식들과의 정으로 가족과 사회적으로 멸시를 당하면서도 파리로 출국하지 않고 국내에 남았다고 한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커서 말년에는 자식을 보고싶어 많은 시도를 했지만 결국 다 무산되었고 요양원에서 탈출하면서까지 자식을 보려 했으나 결국 길에서 쓰러져 발견되었으며, 1948년 12월 10일 저녁 8시 30분 서울시립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디다.
(중략)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