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부르는 멸칭 '혐성국'은 무슨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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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부르는 멸칭 '혐성국'은 무슨 뜻?

 

혐성국은 2018년부터 인터넷에서 크게 유행하는 용어다. 주로 19세기 이후에 제국주의 정책을 펴서 식민지를 착취하고 현대 제 3세계 국가의 갈등과 동아시아 국가의 역사 갈등 및 이념 대립의 단초를 제공한 유럽 및 앵글로 아메리카 국가들, 일본을 비판하는 용어지만, 보통은 대영제국이나 영국을 가리킨다.


대영제국의 전성기인 근대는 제국주의적 사상이 팽배했던 시절로, 국력에 의거한 갑질(식민지 착취 및 패악질 등)은 웬만한 선진국이라면 기본 베이스로 세팅되어 있던 때였다. 사실 식민제국주의 시절 영국이 벌인 각종 만행은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미국,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을 비롯해 식민지를 보유한 전적이 있던 서방권 국가들이나 웬만한 강대국이라면 전부 적게든 심하게든 했었던 짓거리지만, 19세기 패권국으로서의 영국의 영향력과 식민지 영토가 가장 거대했기 때문에 더 주목받는 측면이 있다. 거기다, 이것에 이어서 현 패권국인 미국 또한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출발한 만큼, "미국의 혐성짓도 뿌리를 따져보면 영국"이라는 논리까지 더해졌다.

다만 역사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현대적 도덕적 관점이 아닌 당시의 보편적인 시대상과 배경 등을 고려해야 하며, 아래 후술하는 것과 같이 정확하지 않은 루머기반이나 공과사 중 나쁜 점만 선택 열거하면 그 어떤 국가도 악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점 역시도 유의해야 한다. 단적인 예로 국내 인터넷상의 혐성국이라는 프레임과는 다르게 영국과 옛 영국 식민지 국가들의 모임인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 회원국은 총 54개국으로 영국과 비교적 원만한 친목관계를 유지해가고 있다.

따라서 해당 밈을 가지고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 같은 추축국을 은근슬쩍 동류로 취급하거나, 추축국의 전범행위와 인종청소, 점령지 탄압을 옹호하는 용도로 악용하는 한계가 있다.

또한 영국과 함께 식민제국 투톱이었던 프랑스도 영국이랑 세트로 묶여서 혐성국이라고 까이고 있는 추세다. 실제로 프랑스도 스케일은 영국에게 밀렸을 뿐 만행 수준은 영국 못지 않게 악랄했고, 게다가 전후 식민지가 해체되고 나서 국제 무대에서 영향력은 크게 약해졌지만 그 이후에 국제 외교에서 심각한 트러블을 낸 적은 많지 않은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끝까지 식민지를 포기 못하고 식민지와 전쟁까지 불사하다가 쫓겨나기까지 했는데도, 국제 무대에서 영향력이 강해지지 않은 2020년대조차도 과거 식민지 국가의 내정에 대놓고 간섭하거나 개입하려는 제국주의 시절 행태를 그대로 보이고 있어서 "영국은 유럽의 일본, 프랑스는 유럽의 중국"이나 "영국을 찍고 틀렸다면 프랑스를 찍으면 된다" 또는 "영프는 이미지 세탁질 해준 히틀러에게 큰 절해야 한다"라는 반응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중이다.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혐성국 드립을 꺼낼때 주 소재는 현 패권국인 미국이 남미에 저지르는 갑질이나 중국이 아프리카에 저지르는 사채놀음과 아시아 일대에 저지르는 문화침탈 및 제국주의 정책 같은 현재진행형 횡포 보다는 주로 18,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영국 주도로 중동,아시아,아프리카를 나눠먹은 각종 밀약, 다중계약, 통수들의 역사 건이다.



사실 영국뿐만이 아니라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들, 강대국들이 제국주의 시절 전 세계적인 행패를 부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허나 유튜브와 인터넷 커뮤니티, 블로그 등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출처 불분명의 왜곡된 정보나 당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편적인 서술도 상당히 많이 보이고 있으며, 이 때문에 웹상에서는 이미 영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악역의 캐릭터성을 어느 정도 부여받은 상태이며 많은 인터넷 매체들 역시 이에 편승한 컨텐츠를 쏟아내고 있기에 더욱 비판적인 시각을 구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영국의 과오가 분명했던 역사



제1차 아편전쟁 - 무역 적자가 난답시고 마약을 만들어 밀수출하고, 이 때문에 청나라에서 마약 중독과 국부 유출 문제가 심각해지자 국내에 아편 수입을 금지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당한 조치를 취했을 뿐인데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킨 사건이다. 심지어 이는 당대에도 영국 내부에서조차 논쟁이 심했던 문제로, 전쟁 반대파들에게서는 "승리할 것은 자명하지만 그로 인한 위신의 실추가 더욱 더 두렵다"라는 자조가 나올 정도로 명분 자체가 없는 전쟁이었다.

 


아일랜드 대기근 - 여전히 서로의 관계는 좋은 편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 영국에서 과거사 문제를 인식하고 과거 피식민국이었던 아일랜드의 경제가 성장했으며 오랜 기간 문화 융화가 이루어지는 등의 이유로 인해, 현대에는 양국의 국민 감정이 과거 식민지배-피지배 국가 사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개선되었다.

 


밸푸어 선언 - 이미 맥마흔 선언을 했음에도 중복 계약이나 다름없는 선언을 했고, 이는 4차에 거친 중동전쟁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험악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의 근원이 되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프랑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중동 아랍권 지역을 영국령과 프랑스령으로 나눠먹자는 골자의 조약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들 지역들을 보호령, 위임통치령이라는 명분 하에 식민지로 삼은 다음 종교, 민족, 문화, 역사성 등을 고려치 않은 채 직선 대로 아랍 국가들의 국경선을 긋고 통치하다 제1,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시키면서 현재 중동 지역 분쟁의 원인이 된다.

 


듀랜드 라인 - 현재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이 결정된 사건, 당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군주이던 "압둘 라만칸"과 명확하지 않는 영국령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2년간 협상을 통해 1,287㎞의 국경을 설정했는데 이로 인해 당시 넓게 분포했던 파슈툰족이 두쪽으로 갈라져 다수가 영국령 인도로 귀속되었다. 후일 이 지역이 파키스탄이 되었는데 "북서 국경 주" (North-West Frontier Province - 현재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를 위주로 파슈툰 분리주의가 자리잡고, 이들이 탈레반에 무한으로 병사를 공급하는 원인이 되었다.

 


보어 전쟁 당시 보어인 학살 - 수년간 민간인 속에서 게릴라전을 통해 영국군을 괴롭히는 보어군을 차단하기 위해 수용소를 운영하였고 관리 부족, 전염병 등의 이유로 보어 민간인을 사망하게 만든 책임이 있다.
차고스 제도 요새화 - 미군과 함께 군 기지 건설 때문에 현지 원주민들이 억울하게 난민이 되었다. 모리셔스와 외교적으로 분쟁이 있는 차고스 제도의 영유권 문제의 경우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현지 원주민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내놓지 않은 채 강제로 이주시킨 것은 명백한 영국의 과실이다.

 


술탄 오스만 1세/레샤디예 강탈 사건 -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윈스턴 처칠이 오스만 제국이 대영제국에 주문했었던 전함 2척을 강제로 압류한 사건이다. 전쟁 때문에 군함 한 척이 시급한 상황이라지만 멀쩡히 대금까지 다 양도하고 승무원도 다 승조한 전함을 강제로 강탈한 것. 처칠은 오스만 측에 군함 대여비로 하루당 1천 파운드를 제공하겠다고 제시했는데, 해당 군함의 대금이 275만 파운드였음을 감안하면 2750일(7.5년)을 대여해줘야 원금을 충당할 수 있었으며, 당시 상황상의 전력 공백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푼돈이었다. 당연히 이런 푸대접을 받은 오스만 제국 측에서는 반영 여론이 듫끌었고, 일설에는 이것으로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에 참전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 오스만은 영국과 척을 질 생각이 없었고 끝까지 중립을 고수했었다. 이 사건으로 독일은 반영선전에 열올리며 오스만의 참전을 유도했지만 오스만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벌이자 오스만에 공여한 군함 2척 (사실상 독일의 명령을 받는 독일의 전함)이 러시아 세바스토폴, 오데사, 노보로시스크 등의 항구를 선전포고 없이 무단으로 공격하며 오스만은 동맹국 편에 서게 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 - 영국의 인도와 동아시아 깽판의 주역 중 하나였던 기업. 200년이 넘는 역사답게 수많은 행적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벵골을 시작으로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게 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통치비용을 메꾸기위해 높은 토지세는 기본이고 식량을 재배할 경작지를 갈아엎고 쪽과 아편같은 상품작물 플랜테이션으로 전환했다. 1770년 벵골 대기근엔 천연두와. 가뭄으로 약 100만~ 200만명이 사망한걸로 추정되는데 동인도회사의 세금정책도 이를 가중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