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사이비종교 '백백교'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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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사이비종교 '백백교' 살인사건



일제강점기 1920~30년대 당시 가평에서 창궐했던 사이비 종교 집단이다. 교주가 내린 지시를 따라 300여 건이 넘는 살인사건을 자행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동학에서 파생된 종교이며, 전신은 백도교이다. 정확히 말하면 백도교의 교주인 전정운이 죽고 나서 교주 자리를 놓고 세 아들 간의 다툼이 일어났다. 그리고 세 아들은 각각 인천교, 백백교, 도화교를 만들어 독립한다. 그러다가 1930년, 죽은 전정운이 자신의 첩 4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것을 비롯해 여러 범죄행각이 드러나면서, 이들 사이비 종교들은 한 차례 철저하게 박살난다.

그러던 것을 무사히 도망쳤던 차남 전용해(1895년생으로 추정)가 돌아와 비밀리에 백백교를 재건한다.

입교식은 돈 1원을 내고 행하는데, 먼저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 후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세 번 손을 들었다 놓은 후
이상한 주문을 7번씩 세 차례 외우는 것이었다.

교주 전용해는 학식이 없는 무지한 인간이었지만,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마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말 그대로 혹세무민했다.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였다. 또한 총참모격인 이경득과 문봉조 등 간부들을 각지로 보내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 뒤 그 딸을 전용해의 시녀로 바치게 하여 성폭행했다. 전용해는 이렇게 끌어들인 젊은 여성들을 항상 첩으로 거느리다가 싫증나면 살해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이외에도 배교자, 교단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도 함께 살해했다. 나중에는 이것이 더 심해져서 신자가 너무 많이 몰려서 먹여 살리기 힘들다고 죽이기도 하였고, 경찰에게 들킬까봐 죽이기도 했다. 또한 내부 다툼으로 부교주를 살해하고 매장까지 했다.전하는 바에 따르면 백백교 내부에는 이른바 '부엉이 부대'라고 불리는 첩보원들이 있어 신도들의 행동을 비밀리에 감시했으며, 신도들의 이상행동을 포착하면 그 즉시 간부들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부엉이 부대'의 보고를 받은 간부들은 행동대원들을 시켜 신도들을 살해했다.

당시 체포된 24명의 간부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곤 학교의 문턱을 밟아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들 교주인 전용해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를 '신의 아들'로 믿고 그의 말에 철저하게 복종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라 살인을 저질렀다. 또한 가족 신도들을 지역별 지부에 흩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도망치면 다른 가족들이 죽임을 당할까봐 복종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부와 부친이 백백교에 빠져 여동생을 교주에게 첩으로 바치고 전재산을 빼앗긴 유곤룡이란 청년이 교주 면담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흑막이 폭로되었다.

1937년 일본제국 경찰은 8개월에 걸쳐 전용해의 아지트와 전국 각처의 백백교 비밀장소에서 시체 346구를 발굴했다. 전용해는 몇 달 후 솔밭에서 동쪽을 향해 누운 채 칼로 목을 찌른 사체로 발견되었으나, 얼굴을 산짐승이 먹어치운 탓에 신원 확인이 어려워서 세간에는 신출귀몰한 전용해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잡아다가 자기의 옷을 입히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고 도망쳤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전용해의 자식이 직접 보고 아버지라고 울부짖었다는 기록이 있어 자살한 것으로 판정.

이 일은 당시 영어권 기사로도 보도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잡힌 사람만 해도 100여 명이 넘고 확인된 살인만 해도 300여 건이 넘는지라, 수사와 예심을 준비하는 데만 3년이 걸려 1940년에 첫 공판이 열렸다.

재개한 공판에서는 무수히 많은 방청객들이 몰려들었고, 연일 언론에서 백백교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살인 행각보다는 교주 전용해의 무수히 많았던 첩들과 음란 행위와 관련한 가십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긴 첩이 60여 명이었으니... 1941년 1월에 마무리된 백백교 사건의 선고 공판 결과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십수 명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희대의 살인마 사교 사건은 막을 내렸다. 다만, 위의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진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곧 훨씬 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런 놈들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징역형을 받은 다른 간부들은 8.15 해방과 함께 1945년 모두 출옥하여 아래에서 언급할 잔존세력을 만들거나 다른 사이비 종교로 관여한 듯하다.

이후 백백교는 한국 사이비 종교사에서 가장 손꼽히는 사건이 되었다. 사이비 종교 관련 사건이 나올 때마다 상당히 자주 언급되며 다시 조명받곤 한다.

백백교 사건을 일단락 한 후, 일제는 범죄형 두상에 대한 연구 목적으로 교주인 전용해의 머리를 잘라내어 포르말린으로 절여 범죄형 두상 표본으로 만들었다. 전용해의 머리는 해방 이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보관하였다. 1992년작인 영화 《백백교》의 끝부분에서도 전용해의 머리를 보관하고 있다고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잘 알려진 사실이기는 했으나 흐르는 세월 속에서 전용해 수급 표본이란 존재는 점차 잊혀 도시전설 비슷한 형태로 세간을 떠돌았다.

그로부터 세월이 제법 흐른 2004년, SBS TV 프로그램인 백만불 미스터리의 42회 '국과수 X파일-일제시대 사이비 종교 백백교의 비밀'을 통하여 그 존재가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당시 국과수에 백백교의 신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교주님(=전용해)의 머리를 돌려달라"고 수시로 전화를 걸어서 직접 확인을 해본 것. 이 프로그램에서 최초로 전용해의 수급으로 만든 액침표본의 모습이 전파를 타고 공개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2010년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인 혜문스님이 인체표본 보관 중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한 차례 이슈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국과수에서는 이 머리가 전용해의 것이 맞는지, 왜 이 머리가 보관되고 있는지 자세한 이유를 모르며 단지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조만간 적법한 절차를 거쳐 처리하겠다고 공언하였다. 2011년 10월, 폐기 예정임을 발표. 2011년 10월 25일, 수급 표본은 화장되었고, 이틀 후 봉선사에서 위령제도 지내줌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전용해가 희대의 용안이었다는 것도 유명한 소문이다. 당시 사람들에 의하면 그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신용이 생기고 '이 사람을 따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할 정도였다고. 다만 일부의 증언에 따르면, 전용해는 자신의 얼굴을 아무나 보면 그 기운을 감당치 못해 죽게 된다면서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고도 한다. 심지어 함께 잠자리까지 같이 한 여자들도 전용해의 얼굴을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해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가까운 측근이나 가족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전용해가 신도들과 추종자들을 그렇게 휘어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능력이 천부적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백교 관련해서 당시 처형되지 않은 간부가 일제가 패망하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유야무야 물러나게 되고, 백백교를 재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사람들에게 살인종교로 몰려 별다른 성장을 하지 못했고 이 자가 1978년에 죽으면서 흐지부지되었지만, 잔존세력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백만불 미스터리에서 백백교 관련 내용을 방송한 후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시신을 돌려달라는 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워낙에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사건이었고, 교주가 죽은 데다가 관련 간부들 대부분이 사형당한 터라, 재건되었을리 만무하다. 설사 재건되었더라도 동일한 이름을 내세울리 없다. 애당초 무슨 사이비 종교 관련 사건만 터지면 무조건 '백백교'가 언급되는 판국이니...

한편 2010년의 전용해 두개골 보관 중지를 요구하는 소송과 관련하여 '백백교의 신도들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교주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사실 무근이다.

하지만 백백교가 망한 뒤에도 백백교 같은 짓거리를 하는 사이비 종교는 성행했다. 6.25 전쟁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이런 사이비 종교들은 불길처럼 번져나갔고, 여러 사회문제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