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혁명당 사건이라는 이름 아래로는 크게 두 개의 사건이 있다. 하나는 1964년 일어난 "인혁당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관계되어 일어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후자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사법살인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사법권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건이다. 민혁당 사건과는 전혀 관련 없으며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가 연설 도중에 두 사건을 혼동한 적이 있다. 다만, 민혁당 사건은 진짜 공안 사건이다.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등은 좌익 계열 정당인 인민혁명당(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전국에 수배 중이라고 발표한다.
김형욱이 발표한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간첩 김영춘은 1962년 1월 북한으로부터 특수 사명을 띠고 남하하여 인혁당 조직을 주도한다.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이었던 우동읍과 동 간사장 김배영, 김영광,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이던 김금수, 동 경북도 간사장 도예종, 사회대중당 간사였던 허표, 전 진보당원 김한득, 빨치산 출신의 박현채 등이 참가하여 창당 발기인 대회를 갖고, 외국군 철수와 남북서신, 문화경제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여 발족한다. 이후 조직을 확대해 오다 1964년 4월 북한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중앙상임위원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이 한일협정 반대 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하며, 동시에 학생 데모를 4월 혁명 같이 발전케 하여 현 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으로 8년 간 옥고를 치른 정만진 씨 등은 '인혁당은 실체가 없으며 피고인들의 법정 진술까지 변조할 만큼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 인혁당 사건은 그 해 8월 18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다. 그러나 중정의 발표와 달리 송치받은 검찰은 18일간의 철야 수사에도 기소할 만한 증거와 혐의점을 찾지 못한다. 또한 사건 관련자들이 중정의 조사 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음을 밝혀낸다. 결국 사건 담당 검사 중 최대현 검사를 제외한 부장검사 이용훈, 김병리, 장원찬 검사는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라는 이유로 기소 거부와 함께 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검찰과 중정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김형욱은 숙직 담당 검사에게 압력을 넣어 서명토록 해 간신히 기소했다. 사건은 국회로 비화되고 관련자들의 전기고문, 물고문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자 검찰은 서울 고검 한옥신 검사에게 재수사를 지시한다. 그 결과 당초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된 26명 중 학생 등 14명에 대한 공소를 취하했고, 도예종 등 나머지 12명의 피고에 대해서도 국보법 위반을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등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공소장을 변경했고, 법원은 이들에게 최고 3년에서 1년까지 가벼운 형량을 선고한다.
한편, 사건 관련자 김배영은 이전 1962년 10월에 일본으로 밀항하여서 일본 경시청에서 그를 수배하자 1964년 11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통하여 북한으로 월북했다. 그는 이후 1967년 10월 대한민국에 북한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1971년에 대한민국에서 체포되어 사형이 집행되었다. 또한 "김형욱 회고록"에 따르면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주범인 金培永(김배영)은 체포된 후 일단 무혐의로 풀려난 틈을 타서 또 다른 공범인 미 체포된 禹東邑(우동읍)과 이북으로 도주하였고, 지령을 받고 다시 남하하였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당시 그는 공작금과 난수표,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민혁명당(1964년) 사건에 연루된 도예종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년)으로 사형이 집행되며, 우동읍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우홍선과 동일인물이다.
김배영 같은 경우는 1950~60년대에는 종종 있었다. 동백림 사건에서 볼 수 있듯, 당시에는 분단이 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라 "뭐 좀 이따 통일 되겠지"하고 월북 행위에 큰 문제의식이 없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방 이전부터 사회주의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인물이라면, 북한을 그냥 그런 사회주의 국가로 생각하고 적대시하지 않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인혁당과 관련 없지만, 1960~70년대에는 북한에서 지령을 받고 남파된 간첩이 혁명운동을 조직하기도 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통일혁명당. 다만 민주화가 진행되고 사회가 개방된 1990년대 이후부턴 이러한 접촉 시도 자체가 크게 줄어들었다.
<1974년 4월 3일, 유신정권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 사건 명단>
1972년 10월 유신으로 시작된 소위 유신 정국이 가속되었다. 1974년 4월 3일 학생들의 대규모 반유신 저항 운동을 분쇄하고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다. 그리고 4월 25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학생 데모의 배후에는 공산당의 조종이 있었다는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한다.
발표 요지에 따르면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 단체인 인혁당 재건위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1974년 4월 3일을 기해 현 정부를 전복하려 획책했다는 것이다.
법무부장관 황산덕을 통해 인혁당이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했다고 새로운 주장을 발표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와 더불어 이전 인혁당 연루자들은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의 검찰부에 의해 국보법,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기소된다. 6월 15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를 거쳐 대법원 확정까지 10개월이 걸렸다. 3심을 거치는 동안 피고인들의 형량은 변함이 없었고, 특히 후술할 8인의 사형수들의 형량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형이었다.인혁당 판결(74도3323)
사형 확정으로 끝난 이 재판에 참여한 대법관(당시 대법원 판사)은 민복기(재판장), 홍순엽, 이영섭, 주재황, 김영세, 민문기, 양병호, 이병호(주심), 한환진, 임항준, 안병수, 김윤행, 이일규이다. 이들 중 유일하게 이일규 대법관이 반대하여 반대의견을 냈다. 이일규 대법관은 항소심에서 피고인 신문을 생략하고 항소이유에 관한 변론만을 진행한 것은 제대로 변론 절차를 거쳤다고 볼 수 없다며 재판 절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원심을 파기하고 다시 재판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이일규 대법원장은 훗날 2007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인혁당 사건이) 내가 있던 3부로 배당됐다. 3부 구성원은 주심이 이병호 판사였고 주재황·김영세 판사, 그리고 나였다. 나 혼자 소수의견을 내서 전원합의체로 갔다. 통상 막내 판사가 먼저 의견을 말하는데 내가 의견을 말하자 일순 침묵이 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민복기 대법원장 주재로 다수결을 통해 2심 판결이 확정됐다. 피고인들의 ‘고문으로 그렇게 진술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상고 이유에 대해 ‘그렇게 볼 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상고기각했다.” 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리고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질 때 ‘아이고, 이렇게 생명이 사라지는구나’ 싶었다.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당시 우리 대법원이 군법회의가 내린 1심, 2심의 ‘잘못된 판결을 잘한 재판’으로 잘못 판단한 책임이 있다”고 거듭 말했다.
다만 유족들에 대한 사과 여부를 묻자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라며 사법부의 책임이나 뒤늦은 사과에 대해서는 과거는 과거로 놔두자고 했다. 그러면서 “이미 지난 제도 아래서 내려진 판결이다. 이번 재심판결 역시 이번 제도 아래서 내려진 판결이다. 제도가 바뀌고 나서 판결이 달라졌다고 사과한다면, 제도 바뀔 때마다 예전 판결을 가지고 일일이 사과해야 하는가.” 라고 다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들 인혁당 연루자들은 중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피고인석에 자리했던 피해자들 중 8인의 사형수 중 한 명이었던 하재완은 혹독한 고문에 장이 항문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이들이 고문 사실을 증언해도 판사나 검사들의 강압적 태도로 저지됐다.
이 사실을 폭로한 조지 오글(George.E.Ogle) 목사 와 제임스 시노트(James.P.Sinnott) 신부는 강제 추방당했다. 시노트 신부는 동아일보 등에 인혁당 재판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는 광고를 싣느라 무일푼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인혁당 사건 재판정에서 재판을 히틀러 재판에 비유하면서, "이것은 정의를 모독하는 당치 않은 수작이다! 공산주의 재판보다 더 나쁘다!"라고 외쳤다. 법정에서 조용히 해달라는 말에,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싸여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법정이라고? 여긴 그저 오물들이 쌓여 있는 곳이라고!" (천주교인권위원회 2001)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 피고인 36명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원심대로 형이 확정됐다. 그런데 선고 바로 다음날인 4월 9일에 이들 8명에 대한 형이 집행되었다. 형량이 확정된지 겨우 18시간만이었다. 이날 위로차 면회를 갔던 유족들은 이미 형이 집행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졸도했다고 한다.
당시 희생당한 사형수 8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프로필의 직업은 체포 당시 기준. 현재 이들 희생자 8명의 시신은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현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유신 정권은 사형당한 8인의 시신을 유가족들에게 돌려주려하지 않았으며, 유족의 동의 없이 멋대로 시신을 탈취하여 화장해 버렸다. 고문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었고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워했던 데다, 유족들이 한데 모여 억울한 죽음을 호소할까 봐 그랬다고도 한다. 이 중 우홍선, 이수병 씨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인수됐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집이 서울이 아니어서 바로 인수되지 못했다. 이때 경찰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남은 시신들을 빼앗기고 남은 송상진 씨 시신만이라도 가족들에게 보내기 위해 천주교 사제들이 응암동 성당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크레인까지 동원해 시신을 강탈,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해 버렸다.
이들에 대한 고문과 전격 처형, 화장 등의 잔혹성과 의혹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에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며 사법 살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스위스의 국제법학자협회는 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엠네스티에서도 판결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8~90%가 영남 출신이었고 사형 당한 8명 역시 모두 영남 출신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4명은 본적을 대구경북에 두고 있었다. 때문에 이 사건을 당시 TK 민주 세력의 씨를 말려버리려고 기획한 사건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1995년 4월 25일 MBC의 설문조사에서 판사들이 뽑은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꼽혔다.
사건이후 전격 처형된 8명을 비롯해 이 사건으로 전창일, 김한덕, 나경일, 강창덕, 이태환, 이성재, 유진곤 씨가 무기징역을, 김종대, 정만진, 조만호, 이재형 씨가 징역 20년을, 이창복, 황현승, 임구호, 전재권 씨가 징역 15년을, 장석구 씨 등이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이들 중 장석구 씨가 1975년 10월 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유기수 석방, 8월 15일 무기수 20년으로 감형, 12월 24일 형집행 정치로 20년형 유기수 석방 등의 조치를 통해 출소했다. 그러나 출옥 후 전재권, 유진곤 씨가 지병으로 병사했으며,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박현채 전남대 교수가 95년 사망했다.
사건의 발단에서 진행, 결과에 이르기까지 석연치 않은 일 투성이었다. 정치적 득보다는 해가 많은 사건으로 도대체가 왜 이런 악수를 두었는지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 이후 반정부 세력에서 강경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들은 '아무리 독재자라 해도 없는 죄를 만들어 죽이지는 못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사형 선고를 받아도 영광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인혁당 관계자 8명이 사형당하는 걸 보고 독재자가 누명을 씌워 멀쩡한 사람을 정말로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국제적으로 완전히 찍힌 사실만 봐도 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설령 이들이 실제 간첩이었다 하더라도 너무나 성급한 형 집행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결정이다. 생포한 스파이를 죽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행동이다. 살려서 가지고 있는 정보를 있는 대로 짜내고 나중에는 인질로서 적국과 거래용으로 이용하는 것이 정보전의 정석이다. 당시 중정이 발표한 대로 그들이 고위 간첩이었다면 당장 죽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다시피 한 형 집행이 자신이 조작한 사건임을 입증하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공안정국을 만들려 했다고 봐도 달리 같은 해 일어난 장준하 의문사 사건과 함께 국내 여론의 반발만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또한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기대에 한껏 부풀었던 실향민들의 가슴에는 또다시 대못을 박는 짓에 불과했다. 이후 치러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참패가 이를 증명한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논란이 일면 항상 언급되는 사건이며 사형제 존폐 논쟁에서도 인천 일가족 살인사건과 함께 반대의 예시로 자주 언급된다. 한국에서 사형 제도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늘어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 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후폭풍도 컸다. 해외의 비난 여론은 긴 기간 외교적 짐으로 작용했다. 미국의 보수파 언론조차도 이 사건의 부당성을 강도 높게 비난했을 정도였다. 다음 해 미국의 지미 카터 정권이 도덕/인권 정치를 외치며 들어섰을 때 한미관계가 급격하게 냉각되게 만드는 간접적인 원인으로 열거될 정도다.
박정희도 후에 이 사건을 크게 후회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그러나 이후 중정 요원들이 늘 유가족들을 사사건건 감시하고 연좌제로 묶었던 행태 등에 비추어봤을 때, 동정의 여지는 없다.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후회했다기보다는 해외의 비난여론과 어려워진 외교 관계, 요동치는 민심 때문에 후회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불미스러운 사법살인으로 인해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지역의 진보 세력과 적은 숫자로 남아있던 좌파 세력들이 완전히 뿌리가 뽑혔다는 진단도 있다. 대구 10.1 사건을 비롯해서 대구/경북 지방은 해방 직후 좌파의 성지로 유명했고, 진보세력도 상당히 강했던 지역이었다. 그래서 나온 별칭이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이후에도 1960년대까지 경북 지방은 굉장히 진보적인 사회운동가들이 많은 지역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 1979년 남민전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보수화가 되어버렸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기 이후 대구/경북 지역에서 일어난 공안사건의 숫자와 타 지역의 숫자를 비교해 보면, 대구/경북은 진보적 사회운동의 뿌리가 아예 뽑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가족들의 삶은 정말 비참함 그 자체였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중정 요원들은 물론이거니와, 더욱 가혹하게도 가는 곳마다 '간첩의 집안'이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다녔다. 사형당했던 희생자 하재완 씨의 막내아들은 4살 때 동네 아이들이 자신을 새끼줄로 목에 매어서 끌고 다니며 당산나무에 묶어 놓고 '빨갱이 새끼는 총살해야 한다'며 놀리는, 이른바 '총살놀이'를 했다고 한다. 소풍날에는 반 아이들이 몰려와 '간첩의 자식'이라며 도시락에 개미를 넣고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혁당 희생자 송상진 씨 가족의 경우, 아내가 죄책감에 자식들과 함께 쥐약을 먹고 죽으려고까지 했다. 그 모습을 친정 어머니가 우연히 보고 말렸지만 친정 어머니는 당시 깊은 충격에 빠져 몇 년 뒤 돌아가셨다고 한다. 송상진의 아들 송철환 씨는 '정말 학교 가기 싫었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의 나날'이라고 증언했었다.
이런 식으로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은 수십 년 동안 사회로부터 멸시와 수모를 겪은 채로 살아왔다.
결국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이 사건이 재조명되었고, 유족들은 12월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하였다. 사법부 내에서도 고문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2005년 다시 재판이 시작되어 2007년에 사형 선고가 내려진 8명에게 증거 불충분에 의한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30년이 지났다고 증거 불충분이 된 게 아니다. 법원의 증거는 서류로 남는다.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가 내려진 것은 당시 택도 없는 증거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소리가 아닌, 고문으로 인한 증거의 증거 능력이 효력이 없음을 재심하였기 때문이다. 법원은 증거 능력이 있는 증거를 통해 범죄가 확실히 증명되었을 때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위법하게 수집되었으리라는 심증은 있지만 철저하게 조작되어 조금의 꼬투리도 잡을 수 없는 증거를 법원은 외면할 수 없다'라고 옹호하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 피고인들이 대한민국 검찰청에서의 자백이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재판 과정에서 항변했던 점 등을 생각할 때 현대에서 받아들이는 이들이 알아야할 점이 있다. 고문은 허위 자백과 진술의 심증의 여부를 판단 조차 불가하게 만든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