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연쇄 쾌락살인범 '정남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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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연쇄 쾌락살인범 '정남규'

그는 2004년 1월 14일부터 2006년 4월 22일까지 서울 경기지역에서 14명을 살해하고 19명에게 중상을 입힌 범죄자다. 13명을 살해하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힌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봉천동 세 자매 피습 사건에서 세 자매 중에서 두 명은 사망하고 한 명은 중상을 입은 사건 초기의 언론 보도에 의한 것이다. 마지막 한 명은 중상을 입고 치료받다 얼마 후 사망하였고, 정남규 기소 시에도 살인 혐의에 포함되어 최종 확인된 피살자는 14명이다.


유영철과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던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며 유영철의 소행으로 알려졌던 서울 이문동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밝혀졌다. 그 후 보강 조사에 의하여 범행의 대부분이 밝혀졌다.

정남규는 수사기관의 조사 과정에서 “피 냄새를 맡고 싶다. 피 냄새에서는 향기가 난다”고 말했으며, “천 명을 죽여야 하는데 채우지 못하고 잡힌 게 억울하다”며 살인에 집착하는 모습도 보였다. 법정에서는 “더 이상 살인을 못 할까봐 조바심이 난다”고 토로했다.

흉악성으로는 KCSI 요원 사이에서 역대 최악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전문 프로파일러들조차도 그의 평가에는 일단 욕을 넣고 본다. 최악의 연쇄 쾌락살인범이며, 잘못된 사회와 폭력이 만들어낸 범죄자다. 어떻게든 중벌을 피하고 싶어 동정론에 호소하고 최대한 사실을 숨기려 들며 증거를 들이대도 일단 아니라고 우기고 보다가 견디지 못하면 그제야 자백하는 일반적인 절대다수 범죄자들과 달리, 시키지도 않은 자백을 알아서 하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전부 늘어놓는 등 사형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연쇄살인범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 그러나 한편으론 자신의 범행을 감추거나 스스로도 까먹기도 했다.

정남규의 검거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다. 2006년 4월 22일 새벽, 신길동의 어느 다세대 주택에 침입하여 방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만 원짜리 상품권 1장밖에 발견하지 못하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정남규는 방 안에서 자고 있던 20대 청년을 둔기로 살해하려 했으나 피해자가 극렬히 저항하고 옆 방에서 자고 있던 청년의 아버지까지 합세하여 격투한 끝에 붙잡혀 경찰에 인계된다. 하지만 정남규는 경찰서로 이송하기 직전에 순찰차 뒷자리에서 수갑을 찬 채로 그대로 달아나버렸고 2시간 만에 동네 주민의 신고로 옥상에서 다시 검거된다.

이 사건은 프로파일링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는데 정남규가 처음 검거될 당시에는 단순한 강도상해범으로 보고가 되었다. 즉, 잘못했다면 교도소에서 몇 년만 살다 나온 후 다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었다는 것. 하지만 몇 년간 정남규를 쫓고 있던 프로파일러 권일용이 그를 추궁해 자백을 받아내어 끔찍한 연쇄살인의 진상이 드러나게 된다. 또한 야산에서 운동화끈에 손가락이 묶여 성추행을 당했다는 말에서 힌트를 얻어 운동화끈에 손이 묶여 성추행을 당한 뒤 살해당한 부천 소년 살해 사건에 대해 추궁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등 한마디로 프로파일링의 승리였다.


체포 후 심문 과정에서 범행 후 만족감을 느꼈으며 죄책감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발언을 하여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현장 검증 당시 분노한 시민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달려들려고 하자, 피하거나 고개를 숙이는 다른 범죄자들과는 다르게 시민들을 노려보고 맞서 달려들려 했으며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연행차량 안에 탔을 때는 카메라를 향해 씨익 웃기까지 하며 지켜보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둘 다 살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는 하지만 비슷한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좋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기인한 가진 자에 대한 분노로 철저하게 목적형 범행을 저지른 반면 정남규의 경우 처음부터 철저히 쾌락만을 위한 전형적인 쾌락살인범이라는 점이 다르다.

유영철은 주로 둔기를 사용하여 범행을 저질렀으며 정남규는 날카로운 흉기를 사용하여 범행을 저질렀으며 성폭행과 방화를 함께 저질렀는데 이러한 "찌르는" 행위, 성폭행, 방화 등의 행동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성적인 동기에서 유발되는 것으로 분석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남규도 강간, 성추행을 여러 차례 저질렀었다. 살인(시도)과 성범죄를 함께 저지른 적도 적지 않다. 또한 재판 과정에서 "사람을 더 죽이지 못해 우울하고 답답하다. 빨리 사형을 집행해 달라"는 발언을 하는 등 전형적인 쾌락살인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는 범행을 자백할 당시 "강남구 등 부유층이 사는 동네엔 CCTV가 너무 많아서 CCTV가 없는 곳에서 했다" 는 말을 하였다. 그는 살인을 더 쉽게 하기 위하여 주로 방범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은 서민층 및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지역을 범행 대상으로 잡았으며 침입 방법도 문을 따거나 창문 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문을 열어놓고 있는 집을 대상으로 범행하는 등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는 살인 자체를 쾌락으로 여겨서 좀 더 쉽게 많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장소를 택하는 행동이다.

게다가 이런 자신만의 쾌락을 위해서 범죄를 준비하는데 있어 상상 이상의 힘을 쏟았다. CCTV에 잡히지 않기 위해 지하철 몇 정거장 정도의 장거리를 도보로 이동하였는데 범행을 염두에 두고 범행 현장에서 쉽게 도주하기 위하여 거의 매일 주거지 인근 운동장에서 10km씩 달리기 연습을 하고, 악력기와 역기 등으로 체력을 다지기도 하였으며, 도주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평소에 흡연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방에 있을 때는 건강 정보 프로그램을 꾸준히 시청하며 자신의 식단까지 철저하게 관리하는 등 살인을 쉽게 하기 위해 장기적 계획까지 짰다. 거기에 범죄를 준비하기 위해서 체력만 단련한 게 아니라 학습도 매우 열심히 했는데 나중에 수색된 그의 집에서 과학수사 관련 잡지만 수십 권이 발견되고 체포당하기 직전까지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를 한 편도 빼놓지 않고 계속 시청했다.

또한 자신의 범죄를 전하는 기사를 스크랩하며 수사상황을 학습하고 있었다. 나중에 수색된 그의 집에서는 수사진은 물론 권일용 프로파일러의 얼굴을 찍은 월간지 스크랩까지 발견되어 수사진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한다.



게다가 완전범죄에 최대한 가까운 노력을 했는데 모든 신발에는 밑창을 도려내서 족적이 나오지 않게 했고, 피해자를 신속하고 확실하게 살해하기 위한 흉기를 사용하는가 하면 지문이 쉽게 발견되지 않으면서도 미끄럽지 않은 장갑을 착용했다. 그래서 그 오랜 기간 동안 잡히지 않고 살인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문동 살인 등 일부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아있었다가 정남규가 알아서 자백하는 바람에 진상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가 밝힌 동기 중에 어린 시절 성학대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실제 첫 번째 범행으로 알려져 있는 부천 초등학생 피살 사건에서는 당시 10살과 11살 남자아이 두 명을 납치하여 자신이 당했다고 진술한 방법과 동일한 수법으로 성추행한 뒤 살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하지만 동정심을 받아서 감형을 받기 위하여 자신의 첫 번째 범행에서 모티브를 얻어 꾸며낸 자작극이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오히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소아성애자들이나 이와 비슷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 대항할 힘이 없는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살인, 성범죄, 잔혹 행위 등의 각종 범행과 같은 맥락에서 저지른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게다가 이후 범행은 거의가 힘 없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러한 증언의 조작이나 편집은 감형의 구조를 알건 모르건 누구라도 한 번쯤 시도하는 방법이며 적게는 정상 참작, 많게는 심신미약으로 인한 감형 내지는 형의 면제를 받기 위한 수법이다. 일단 책임능력이 부정된다면 판사로서는 중형을 선고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 때문에 심문 과정에서 이러한 증언의 모순을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된다.

또한 재판 과정에서도 그의 피해자는 저소득층 및 여성으로 전원 사회의 약자들이고 그 목적이 엄연히 쾌락에 의한 연쇄살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를 더 죽이지 못해 억울하다"는 주장을 하는 등 자신의 살해 동기를 조작하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더욱 주장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판사들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동기라고 판단해 "반성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는 논조로 판결을 내렸다.

2007년 4월 대법원까지 가는 재판 끝에 사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담배는 끊어도 살인은 못 끊겠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2009년 11월 21일, 서울구치소에서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여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음 날 새벽에 사망했다. 당연히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빈소에도 그의 누나 외에는 오지 않았다. 향년 40세. 유언은 남기지 않았으나 최근의 사형 여론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한 것으로 볼 때 사형 집행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자살을 결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